[매거진S] 김동현 '절망의 끝에서 옥타곤에 우뚝 서다'
종합격투가 김동현이 세계 최대의 격투단체인 미국의 UFC에서 활약한지 무려 5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열 번이 넘는 경기를 치러 온 김동현은 여러 차례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성공적인 데뷔전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 UFC 파이터로 주목을 받았고, 한 때 연승행진을 거두며 UFC 챔피언도 더 이상 꿈이 아니라는 기대도 받았지만, 그 문턱에서 처참히 무너지며 좌절했었고, 그 후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인해 어이없이 또다른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코리안 좀비’ 정찬성이나 한국계 파이터 벤 핸더슨 등이 그가 꿈꾸던 UFC 챔피언쉽 무대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고, 김동현에게 주어졌던 기대와 관심은 점차 줄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에는 김동현과 비슷한 스타일의 아시안 파이터인 오카미 유신이 UFC에서 퇴출되며 김동현도 이제 ‘끝물’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풍전등화였던 상황에서 김동현이 ‘대박’을 터뜨렸다. UFC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시장이자 전통 격투기 강국인 브라질에서 브라질리안 웰터급 선수들 중 가장 주목받는 신성인 에릭 실바를 당당히 KO로 꺾은 것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 화려한 승리로 인해 김동현은 제 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는데, 사실 그 승리 뒤에는 엄청난 피땀, 그리고 눈물이 숨어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정면승부를 펼친 끝에 일궈낸 김동현의 이번 승리, 그 뒷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을 짜릿하게 만들어주었던 바로 이 장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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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S(이하 S) :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겠지만, 이번 승리 너무 멋졌다는 축하 인사를 일단 보내고 싶다.
김동현(이하 김) : 고맙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S : 한국에 돌아온 후 굉장히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 : 서른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구미에서 열린 로드 FC 대회장을 찾았다. 너무 피곤했지만 팀 동료들을 응원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화제가 되었을 때 국내 대회장을 찾아 팬 여러분들을 만나 뵙는 게 국내 격투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사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UFC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바 있지만, 이 정도의 열광적인 반응은 진짜 처음이다. 격투기 선수는 일단 승리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깨닫고 있다.(웃음)
S : 이번 경기에 대해서 좀 심도 있는 얘기를 듣고 싶다. 경기 제의가 온 게 언제였나?
김 : 6월~7월 정도로 기억한다. 언제나 그렇듯 UFC 측에서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S : 상대가 그토록 강한 에릭 실바라는 걸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김 : 올게 왔구나 싶었다. 어차피 연승 중이니 이번엔 진짜 어려운 상대가 올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에릭 실바의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 양성훈 감독님과 함께 한숨을 살짝 쉬긴 했다.(웃음) 하지만 곧바로 한번 해 보자고 함께 의지를 다졌다. 어차피 UFC 탑레벨 선수들은 다 강하니까.
적진 브라질 입성 당시. 해병대 전우회의 환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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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브라질은 명실상부한 UFC의 최대 외국 시장이다. 그런 브라질 현지에서 인기 신예 파이터인 실바와 코-메인 이벤트에서 격돌한다는 것, 왠지 현지 흥행을 위한 ‘떡밥’으로 던져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나?
김 :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나는 이번에 제물로 던져지는구나.’라는 것이었다. 브라질 팬들은 멋지고 화끈한 경기보다 자국 선수가 이기는 걸 우선으로 원하고, UFC 주최 측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코-메인이벤트 출전이라며 잘 싸우라는 조 실바(UFC의 대표 매치메이커)의 메시지가 오히려 상당히 서늘하게 들렸다. 등골이 약간 오싹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렇게 말은 안 했지만 ‘오카미 유신 봤지? 어차피 너도 이런 경기에서 똑바로 안하면 바로 퇴출이야!’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한 위기감이 들었다.
하지만 난 원래 UFC에 가기 전부터 항상 외롭고 힘들게 외국에서 시합을 뛰었었다. 그때마다 배운 건 사람은 궁지에 몰릴 때 큰 힘이 나온다는 거다. 완전 위기다 보니 우리 팀도 그 어느 때보다 똘똘 뭉쳐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적지지만 몇 명은 날 응원해 줄 거야. 힘내자.’라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 ‘난 이 대회를 망치러 왔다. 난 브라질에 찾아온 악당이다.’라 생각했다. 또, 한국에서 아는 사람들 앞에서 멋진 경기 보여주는 것보다 브라질에서 나 죽으라고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대회를 망쳐놓는 게 더 쉽다는 양성훈 감독님의 말씀이 엄청난 힘이 되었다.(웃음)
S : 본인이 지금 언급했지만, 사실 같은 아시아의 강자인 오카미 유신이 퇴출되었을 때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김 : 한동안 너무 심란했었다. 경기도 하기 전에 내 자신이 퇴출 직전에 몰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감독님에게 “사무실에서 명퇴 준비하며 짐 싸는 느낌이 이런 거겠죠.”라 자조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사실 억울하고 서러웠다. 화끈한 타격만 힘든 게 아니라 그라운드 파이팅도 굉장히 힘들다. 훈련으로만 따지만 레슬링 및 그라운드 훈련이 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카미나 나같은 그래플러들이 타격가들에 비해 이렇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현실이 서러웠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격투기 팬으로서 화끈한 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팬들이나 주최 측에 대한 서운함은 없었다. 다만 그래플러로 태어난 내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우울해하던 어느 날, 퇴출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다 문득 UFC 선수로 뛰고 있는 현재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란 걸 깨달았다. 사실 항상 퇴출의 위협 속에서 1승을 갈구하며 수도승처럼 살아야 하고, 한 번 지기라도 하면 다음 경기 때까지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UFC 선수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매일 은퇴 후 자유를 즐기며 사는 내 모습을 그리며 행복을 꿈꾸곤 했다. 하지만 마치 스크루지 영감처럼 은퇴한 후의 미래로 돌아가 현재를 돌아본 것 마냥 지금 이 순간의 내가 가장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절실함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지만, 그 후엔 오히려 더 독기가 생겼다고 할까.
시합전 체중 감량은 파이터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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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기 전 심한 목 부상을 입어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았나.
김 : 사실 목 부상이 심해서 레슬링이나 그라운드 훈련을 전혀 할 수 없었는데, 그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원래 에릭 실바가 넘어뜨릴 타이밍을 잡기 힘든 스타일이다. 그래서 머리로는 타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에서 ‘에이, 원래 하던 대로 레슬링으로 나가면 어떨까.’란 달콤한 유혹이 자꾸 새어나왔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조건 타격으로 나가자고 결심하니 외려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실바도 내가 레슬링 전략을 갖고 올거라 생각해 테이크다운 방어훈련에 90% 할애를 할 텐데, 아예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어 당황시키자고 생각했다. 또, 전혀 구체적 근거는 없었지만 내 멋대로 에릭 실바 또한 나 정도의 부상을 입고 나올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편하게 다졌다. 어차피 시합을 위해 3~4개월 간 격한 훈련을 소화한 후 멀쩡한 몸으로 옥타곤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S : 그러더니 시합에서 정말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김 : 원래 초반에는 무조건 치고받기보다는 클린치로 실바의 체력을 빼는 게 목표였다. 경기 시작 직후 내가 실바를 넘어뜨리려다 실패했는데, 난 어차피 못 넘어뜨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그에 대한 상황을 늘 상정하며 훈련해 왔기에 그저 ‘아, 못 넘겼구나.’ 했다. 그런데 뒤로 빠지는 실바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와 한 번 엉킨 다음 숨도 가빠지고 뭔가 싫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래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S : 하지만 1라운드 후반엔 결국 넘어뜨리는 데 성공하지 않았나.
김 : 그런데 오히려 그라운드로 가자 내가 더 힘들었다. 체력이 더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2라운드 들어가서는 아예 테이크다운 생각을 버리고 무조건 압박하려 했다. 나중에 경기 영상을 보니 내가 큰 타격도 몇 개 허용하던데, 사실 경기 중에는 결정적인 충격 같은 건 없었다. 포기하고 싶거나, 위축되는 마음도 전혀 없었다. 물론 맞아서 아프긴 했지만, ‘날 때릴수록 이 녀석은 지친다. 날아오는 타격을 보고 맞는 이상 절대 KO는 되지 않는다. 때려라. 또 때려라. 3라운드에 가서 괴롭혀 주마.’라 생각하며 무조건 들이댔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1라운드가 끝나고 이기자는 생각은 아예 버렸었다. 한 라운드를 뛰어 보니 실바가 기존의 내 필승 패턴에 대한 준비를 너무 많이 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내가 이제까지 해 온 대로 하려다가는 무조건 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을 비운 상태로 무조건 들이대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링 밖에서는 쾌할한 남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치있는 입담을 뽐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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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해서 그렇지, 사실 격투가로서 본인의 원래 스타일(그것도 대부분 승리를 거두던)을 버리고 모험을 한다는 건 팬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경기 전 마음의 갈등도 심했을 것 같다.
김 : 맞다. 사실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은 원래 늘 3번 전략으로 준비하던 건데, 이제까지는 항상 레슬링 위주의 1,2번 전략이 먹혔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곧바로 실행에 옮기자는 마음을 먹기가 힘들었다.
내가 경기 끝나고 옥타곤에서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말이 “(양성훈) 감독님 감사합니다.”였다. 사실 옥타곤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돌진 작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원래는 태클 작전도 있었는데, 경기 당일 감독님이 카운터 태클을 버리고 무조건 돌진하자고 요구하시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물론 연습은 수 백 번 해왔지만 실전에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의심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래서 솔직히 경기 당일 오전에는 시차 때문에 밀려오는 졸음 속에서 ‘그냥 서 있다가 원래 하던 대로 카운터 태클이나 들어가자.’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합 직전 몸을 푸는데, 갑자기 양성훈 감독님이 굳은 표정으로 “동현아. 돌진해야 한다. 실바가 분명 이걸 준비했을 거다.”하 하시며 갑자기 가벼운 스파링 모션 중 원투에 이은 하이킥을 날리셨다. 내가 원래 뒤로 빠질 때 왼쪽으로 숙이는 버릇이 있는데 그 타이밍에 정확히 오른발 하이킥이 들어왔다. 물론 경기 직전이었기에 감독님이 진짜로 때린 건 아니었지만, 실제 하이킥을 맞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띵했다. 그 순간 뭔가 정립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모든 의심이 날아갔다. ‘내가 뒤로 빠지면, 실바는 진짜 이렇게 들어올 것이다. 무조건 전진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시합 30분 전에 감독님의 하이킥 덕분에 각성이 되어 정신무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계속 얘기한다. 이번 승리는 내가 만든 승리가 아니라 양성훈 감독님이 만든 작전의 승리다. 나 스스로도 못 믿었던 내 자신을 믿고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신 감독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S : 그래도 그렇게 들이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다. 특히 과거 카를로스 콘딧에게 KO된 후 안와골절 수술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까지 지지 않았나. 그러면 오히려 타격에 대한 공포심이 더 생겼을 법도 한데 정말 대단했다.
김 : 말씀과는 반대로 콘딧 전은 내게 정말 좋은 약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타격으로 KO되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콘딧에게 KO 당해보니 이건 고통도 없고 기억도 없었다. ‘아, 이게 KO되는 느낌이구나. 별 거 없구나.’ 싶었다.
오히려 콘딧 전을 통해 얻은 교훈은 따로 있었다. 당시 내 마인드는 소위 ‘개판’이었다. 시합 동안에 ‘멍때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초반에 콘딧이 전진하지 않고 빙빙 돌았는데, 그 때 생각한 게 ‘어? 안 들어오네. 그래, 이런 식으로 시간 때우자.’였다. 그러다 KO된 후 눈 수술하고 병원에 앉아서 그런 마인드에 대해 죽을 만큼 후회하며 격투기는 결국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때우는 것 따위는 없고 무조건 이겨야 된다. 이기고 나서 사과하더라도 어쨌든 이겨야 한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니까.
승리의 순간에도 패배의 순간에도, 언제나 든든히 뒤를 지켜주는 스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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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멋진 승리를 거두었지만, 앞으로 단순히 승리가 아닌 멋진 경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더 커졌을 수 있을 것 같다.
김 : 나도 이번에 정말 느낀 게 많다. 이번에 팬 분들께서 좋아해 주시는 걸 느끼며 ‘격투기 선수 생활을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구나.’ 싶다. 물론 항상 실바 전 같은 승부를 만들어 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래플링을 하든 타격을 하든 이번처럼 내 전부를 쏟을 각오가 되어 있다. 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승리에 대한 집착에서 조금 벗어나, 전략 자체를 좀 더 팬들의 즐거움을 위해 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S : 마지막으로 팬 여러분들에게 인사 한 마디 부탁드리겠다.
김 : 일단 너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번 경기 후 너무 많이들 좋아해 주시지만 제가 앞으로 경기에서 지거나 실수를 하면 다시 비난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팬 여러분들을 위해 더 열심히 훈련하고 싸우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머나먼 타국 브라질에서 강적에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가슴 깊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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